스페인 안달루시아 성주간 행렬, 죽음·부활·장례의 서사
스페인의 남부 지방인 안달루시아(Andalucía)는 풍부한 문화적 유산과 강한 종교적 전통을 간직한 지역으로, 매년 부활절 전 주간인 ‘성주간(Semana Santa)’이 되면 도시 전체가 장엄한 분위기에 휩싸인다.
성주간은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기념하는 기독교 최대 의례 중 하나로, 안달루시아에서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 대규모 종교 행렬이 도시 곳곳에서 펼쳐진다.
특히 세비야, 말라가, 그라나다 등 안달루시아 주요 도시에서 진행되는 성주간 행렬은 단순한 종교 행사나 지역 축제를 넘어, 죽음을 기념하고 애도하는 장례적 정서와 부활의 희망을 함께 담아낸 의례로 자리 잡고 있다.
이 행렬은 예수의 죽음을 상징하는 조각상과 장례 행렬 형식의 구성, 침묵과 애도의 분위기 등을 통해 장례문화의 한 형태로 이해되기도 한다. 본 글에서는 ‘각국의 전통 장례문화 및 장례 절차’라는 맥락 속에서 안달루시아 성주간 행렬이 가진 죽음과 장례의 서사, 공동체적 애도 방식, 그리고 현대적 의미의 확장까지를 살펴본다.
성주간 행렬의 장례적 구조와 상징성
안달루시아의 성주간 행렬은 매우 구체적인 장례 서사의 구조를 갖고 있으며, 그 형식 자체가 죽음과 장례의 절차를 은유하고 있다. 행렬은 ‘코프라디아(cofradía)’라고 불리는 신앙 형제단에 의해 조직되며, 각 형제단은 자신들만의 성상(聖像)과 의식을 준비해 일 년에 단 한 번, 성주간에 그것을 대중 앞에 선보인다.
행렬은 대개 예수의 십자가 처형과 고난, 성모 마리아의 슬픔을 중심으로 구성되며, 관처럼 꾸며진 장식 수레인 ‘파소(paso)’에 조각상을 올려 수십 명의 사형제들이 어깨에 메고 도시를 천천히 행진한다. 이 모습은 예수의 장례 행렬을 재현하는 동시에, 고인을 애도하고 추모하는 장례식의 전통적 형식과 유사하다.
파소 앞을 선도하는 북과 트럼펫 소리는 마치 장례식장의 장송곡처럼 느껴지며, 긴 망토와 뾰족한 두건을 쓴 ‘나사레노(Nazareno)’라 불리는 참가자들은 통곡과 기도, 침묵으로 행렬을 이끈다. 이들은 고인의 장례에 참석한 조문객처럼 행렬의 분위기를 무겁고 경건하게 유지하며, 장시간 행진 내내 금욕과 헌신을 실천한다.
특히 ‘성 금요일(Viernes Santo)’ 밤에 진행되는 행렬은 어둠 속에서 촛불과 침묵이 더해져, 마치 고인의 마지막 밤을 지키는 장례 의식처럼 장엄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이처럼 성주간 행렬은 단순한 종교 퍼레이션이 아니라, 죽음을 기리는 장례의 상징성과 절차적 구조를 갖춘 민속적 의례로 해석될 수 있다.
애도와 통곡의 집단 감정, 공동체 장례의식의 역할
성주간 행렬은 단순히 조각상과 참가자만으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수천 명의 시민과 관람객이 함께 감정적으로 참여하는 집단적 장례의례이기도 하다.
예수의 조각상이 지나갈 때 길가의 시민들은 촛불을 들고 묵묵히 고개를 숙이거나, 때로는 성모 마리아를 향해 통곡을 하기도 한다. 특히 전통적으로 여성들은 ‘만틀라(Mantilla)’라는 검은 망사 베일을 쓰고 검은 옷을 입은 채 성모상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는데, 이는 마치 실제 장례식에서 유족이 고인을 애도하는 모습과 닮아 있다.
이러한 집단적 슬픔의 표현은 안달루시아 문화에서 죽음이 어떻게 공동체 전체의 감정으로 받아들여지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다. 행렬 중간중간에는 ‘사에타(Saeta)’라고 불리는 즉흥 애가가 불려지는데, 이는 한 개인이 창문이나 발코니에서 뜨거운 감정으로 예수나 마리아를 향해 부르는 애절한 노래다. 사에타는 전통적인 플라멩코의 구조를 따르며, 장송곡처럼 깊고 강한 울림을 주어 참여자들의 심정을 더욱 고조시킨다.
이처럼 성주간 행렬은 단지 신앙적 헌신을 드러내는 퍼포먼스를 넘어, 죽음에 대한 집단적인 애도와 슬픔을 표현하고 공유하는 장례적 의례의 기능을 수행한다. 도시 전체가 함께 슬픔을 느끼고 표현하며, 이를 통해 상실을 공동체의 기억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이는 현대 장례문화에서도 강조되는 ‘공동체 추모’의 한 형태로 해석될 수 있으며, 안달루시아 지역 고유의 정서가 깊이 반영된 문화적 장례 방식이라 할 수 있다.
종교와 민속의 경계를 넘는 죽음의 재현
안달루시아 성주간 행렬은 본질적으로 가톨릭 전례에 기반을 두고 있지만, 오랜 세월을 거치며 민속성과 예술성, 지역성까지 복합적으로 얽혀 있는 의례로 발전해 왔다.
행렬에 참여하는 각 형제단은 수 세기 동안 유지된 전통 의상을 착용하고, 특정 순서와 상징성을 고수하면서 의식을 거행한다. 그러나 그 안에는 각 마을과 가족, 개인이 가진 고유의 상실 경험과 죽음에 대한 인식이 덧입혀져 있어, 일률적인 종교 행사가 아니라 다양한 죽음의 서사를 담은 복합적 장례 재현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많은 지역에서 예수의 조각상은 마치 실제 고인의 시신처럼 섬세하게 제작되어 있으며, 붉은 상처와 피, 무표정한 얼굴을 통해 죽음의 실재감을 강하게 드러낸다. 이 조각상이 느리게 이동하며 사람들 앞을 지나갈 때, 관람객의 표정은 진지해지고, 많은 이들이 고인을 배웅하는 듯한 자세로 침묵 속에 시간을 보내게 된다. 이 장면은 실제 장례식에서 고인의 운구 행렬을 따르는 유족과 조문객들의 모습과 거의 유사하다.
또한 이 시기에는 도시 전역에서 상점이 문을 닫고, 대중교통이 중단되며, 모든 일상이 멈추고 행렬에 집중된다. 이는 사회 전체가 한 명의 죽음을 함께 애도하는 상징적 공간이 되며, 그 자체로 장례문화의 확장된 형태로 볼 수 있다. 즉, 성주간은 단지 종교적 사건을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의 사회화’가 실현되는 기간이기도 하다.
현대화와 관광 속에서도 유지되는 장례 서사
오늘날 안달루시아의 성주간 행렬은 종교 의례이자 지역의 대표적인 문화유산으로, 많은 관광객들이 이 시기에 맞춰 도시를 방문한다. 하지만 상업화와 관광 중심의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이 의례의 중심에는 여전히 죽음과 부활, 장례의 서사가 강하게 자리 잡고 있다. 현지 주민들에게 성주간은 단순한 관람 대상이 아니라, 감정적으로 깊이 관여하는 삶의 일부이며, 해마다 이 시기를 통해 자신과 공동체의 죽음을 성찰하는 기회로 삼는다.
현대에는 미디어 중계와 디지털 플랫폼을 통해 성주간 행렬이 전 세계로 확산되고 있으며, 고인과 이별한 가족이 이 행렬을 하나의 추모 의식처럼 참여하거나 공유하는 경우도 있다. 또한 일부 지역에서는 개인의 장례식과 성주간 행렬을 연결해, 고인의 명복을 빌기 위한 특별 미사나 공동 기도를 진행하기도 한다. 이러한 움직임은 성주간이 단지 과거의 죽음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슬픔과도 연결되는 살아 있는 장례문화임을 보여준다.
안달루시아의 성주간은 장례의 형식을 예술적으로 확장하고, 공동체적 애도를 공공의 장으로 끌어낸다는 점에서 다른 국가의 전통 장례문화와 차별화된다. 이는 ‘각국의 전통 장례문화 및 장례 절차’ 속에서도 종교와 민속, 예술과 장례가 조화를 이루는 독특한 사례로 주목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