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네시아 술라웨시섬 한가운데 자리한 타나 토라자(Tanah Toraja)는 울창한 계곡과 필리핀해판이 만든 단층 산지가 어우러진 고원이다.
토라자 족은 이곳에서 알룩 톤도키(Aluk Todolo)라는 고대 조상숭배 신앙을 지켜 왔고, 죽음을 공동체 최대 축제로 승화시켰다. 장례식인 라무난(Rambu Solo’)은 소·돼지를 수십 마리 희생 제물로 바쳐 가문의 체면과 조상의 위의를 드러내는 의례다. 그러나 토라자의 장례가 특별히 주목받는 이유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매 3년 또는 5년마다 무덤을 열어 조상을 꺼내 씻고 새 옷을 입혀 마을을 함께 행진하는 ‘마네네(Ma’nene)’가 있기 때문이다. 한때 ‘신기한 풍습’ 정도로 소개되던 마네네는 오늘날 문화인류학·사회경제학·관광학 연구의 핵심 사례로 자리 잡았으며, 다양한 전통 장례문화가 공유해 온 ‘사후 돌봄’ 관념을 극적으로 구현한다.
본문은 토라자의 종교·역사적 배경, 마네네 절차, 사회경제적 논쟁, 그리고 디지털 시대의 변화까지 다루어 각국 장례문화의 공통점과 차별성을 입체적으로 살펴본다.
토라자 전통 장례문화와 알룩 톤도키 신앙
토라자 사회는 20세기 네덜란드 식민 통치 시기에 개신교 선교, 인도네시아 독립 이후 이슬람 확산을 겪었지만, 죽음을 다루는 영역만큼은 알룩 톤도키가 여전히 지배적이다.
교리에 따르면 인간의 생애는 ‘바와(삶)–보로(죽음)–마네네(돌봄)’라는 순환 구조로 이어지며, 조상은 죽어서도 가족을 보호하는 실존적 존재로 남는다.
라무난을 준비하는 과정에서는 가문과 친인척 네트워크가 모두 동원돼 경제적 자원을 모은다. 2024년 마캇(Makate) 마을의 평균 장례 비용은 6억 루피아(약 5만 USD)였는데 주민 65 %가 농업 종사자라는 사실을 고려하면 엄청난 규모다.
흥미롭게도 토라자 사람들은 경제적 부담을 ‘죽은 이를 위한 마지막 선물’이라 여겨 빚을 내서라도 의례를 성대히 치른다. 이는 네팔 힌두 화장처럼 계급·카스트에 따라 장례 양식이 구획되는 체계와 달리, 토라자가 ‘장례의 규모로 공동체 결속과 평등’을 표현한다는 점에서 두드러진다.
또 필리핀 이푸가오 족의 수목장, 일본 오키나와의 뼈 줍기처럼 ‘사후 돌봄’이 존재하지만, 시신을 실제로 꺼내 미라를 다시 단장한다는 점은 토라자만의 독특한 문화적 선언이다.
마네네 장례 절차의 구체적 과정
마네네는 건기 중 음력 7월 이후 보름달이 뜨는 주간에 열린다. 가족 대표가 절벽 무덤 리앙(Liang)에 도착하면, 전통적으로는 계피·정향·동백을 섞어 만든 향유를 관 틈에 바르고 악령을 물리치는 주문을 외운다. 관뚜껑을 열어 미라 상태의 시신을 꺼내면, 파파야 잎과 쌀겨, 시트러스 껍질을 우린 미지근한 물로 부드럽게 피부를 닦는다. 현대 도시 출신 가문은 부패를 늦추기 위해 살균된 가제와 에탄올, 석시닐알데하이드 용액을 사용하기도 한다.
의복 교체 단계에서는 생전 지위를 상징하는 전통 직물 ‘이카트(Ikat)’ 대신, 고인이 좋아했던 브랜드 티셔츠나 축구 유니폼, 정장을 입히는 일이 늘었다. 토라자 관광공사 조사(2025)에 따르면 최근 3년간 시신 의복에 현대 패션 아이템을 사용한 비율이 46 %로 급증했고, 이 모습이 SNS에 퍼지며 ‘언데드 패션쇼’라는 해시태그로 1억 뷰 이상 조회됐다.
옷을 갈아입힌 뒤 가족과 주민이 시신을 안고 오솔길을 따라 전통가옥 똥코난(Tongkonan)까지 가면, 물소뿔 장식 깃발이 나부끼고 북·짜랑기(대나무 트럼펫)가 흥겹게 연주된다.
행진은 산 자와 죽은 자의 경계를 허물며, 가족 모두가 조상을 다시 맞이하는 상징적 귀가 의식이 된다. 최종 단계에서 관을 재안치하기 직전, 가족은 즉흥 창가 파아드로(Paadro)를 부르며 고인의 일화를 회상한다. 배우자가 물소 피·뼈·허브를 섞은 파사(Pa’sa) 수프를 나눠 먹는 순간, 알룩 톤도키 교리가 요구하는 ‘돌봄 의무’가 새롭게 갱신된다.
경제·보건·정체성 논쟁과 현대적 과제
마네네 시즌이 되면 해외 관광객과 연구자, 다큐멘터리 제작진이 몰려와 토라자 지역 경제가 활기를 띤다. 2024년 8월 한 달 동안만 숙박·교통·기념품 매출이 150억 루피아(약 100만 USD)를 기록했다.
지방 정부는 이를 지역 개발 재원으로 활용하려 하고, 주민들도 ‘전통문화와 생계가 동시에 유지된다’는 이유로 대체로 긍정적이다. 그러나 인도네시아 국립울레마협의회(MUI)와 일부 이슬람 단체는 “시신을 반복 노출하는 행위는 비이슬람적이며, 종교적 감수성을 해친다”고 비판한다.
기독교 토라자교회 일부 목회자도 ‘인권·위생 침해’를 들어 문제를 제기한다. 보건부 통계에 따르면 마네네 기간 폐렴·장티푸스 신고 건수가 평시 대비 3.8배, 소아 호흡기 질환은 4.2배 증가했다.
이에 토라자군청은 2024년 새 조례를 제정해 시신 공개 48시간 제한, 방부제 처리 의무 신고, 관람객 N95 마스크 착용을 규정했지만, 전통주의자들은 “조상을 질병 취급하는 모욕”이라며 집단 청원을 제출했다. 이러한 갈등은 네팔 파슈파티나트 화장터의 전기화장 논쟁, 독일 바이오우르네 도입, 한국 수목장 확대와 49재 간 충돌처럼 전통 장례문화가 현대 보건·환경·종교 규범과 부딪히는 보편적 문제를 드러낸다.
디지털 기술과 전통 장례문화의 공진화
토라자 지방정부는 2030년까지 마네네를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하기 위해 학계·NGO·관광 업계와 협력 중이다. 유네스코는 ‘보편적 가치·윤리성·지속가능성’을 요구하므로, 위생·환경·인권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흥미롭게도 토라자 청년층은 의례를 디지털 플랫폼으로 확장하고 있다. 증강현실(AR) 필터를 이용해 조상의 모습을 가상 복원하고, ‘디지털 마네네’ 웹사이트에서 NFT(대체 불가 토큰) 형태로 조상 소장품 이미지를 발행해 디지털 추모품으로 거래한다.
2025년 1~6월 NFT 거래액은 8만 USD를 넘겼으며, 수익금 일부가 지역 문화보존 기금으로 환원됐다. 이러한 흐름은 일본 도쿄의 VR 추모관, 프랑스 파리의 메타버스 묘지 설계와 함께 전통 장례문화가 첨단 기술·기념경제(Memorial Economy)와 공진화하는 대표 사례로 꼽힌다.
결과적으로 마네네는 “죽은 이를 어떻게 기억하고 돌볼 것인가”라는 인류 보편적인 질문에 대해 ‘보이는 돌봄’이라는 창의적 답을 제시하며, 장례 의례를 넘어 문화·경제·기술 융합의 미래 가능성을 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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